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한국프로야구/1984년|1984년]]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투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투수 부문 수상자 (1984)}}}''']] || 최동원을 불멸의 투수로 만들어준 경기가 바로 [[1984년 한국시리즈|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다. 당시는 전기/후기리그로 나누어서 전기 1위와 후기 1위 팀에게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주었다. 만일 한 팀이 전후기 모두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 1985년부터 전체승률 1위는 한국시리즈 진출권을 얻고 리그 우승팀인 두 팀이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그러나 1985년 전체승률 1위+전기리그 후기리그 우승을 싹쓸이하며 삼성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우승을 차지 하자 최고의 흥행카드인 한국시리즈가 사라질 수 있는 시즌이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KBO는 결국 1986년부터 전, 후기리그 1, 2위팀에게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주고 진출권 2장이면 한국시리즈 직행하는 제도로 바꾸고, 1989년부터는 단일리그제로 바뀌면서 준플레이오프가 도입된다.] 1984년 전기리그 1위를 달성한 팀은 삼성이었다. 삼성 [[김영덕]] 감독은 후기리그에선 선수들을 쉬게 하여 전력을 보존하고, 각 팀을 분석해서 최대한 만만한 팀을 후기 리그 1위로 만든 뒤에 한국시리즈를 무난하게 가져가려고 했다. 결국 후기리그 막판에 완전히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연발하면서 위협적인 OB 베어스를 떨구고, 대신 롯데 자이언츠를 후기 1위팀으로 만드는 추태를 부렸다.[* 객관적인 전력상 최동원 빼면 롯데는 삼성보다 한수 아래라는 평가가 많았다. 게다가 최동원조차 고의패배 경기를 제외하면 1984년 삼성전 전적은 2승 4패 3세이브로 썩 좋지 않았다. 즉 김영덕 감독은 7전제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기껏해야 선발로 3경기 나올 걸로 보고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기면 된다고 계산한듯 싶다.] 당시 삼성과 롯데의 마지막 3연전을 중계하던 방송캐스터가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당시 롯데는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기면 OB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1위가 되는 상황에서 김영덕 감독의 배려를 사전에 감지하고 노골적으로 2군과 후보 선수들을 기용해서 주전을 쉬게하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 그리고 이게 전국에 TV 생중계 되면서 일파만파... 김영덕 감독은 지금까지도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한다'-- 란 감독의 대명사로 불린다. 최근 몇년간은 [[김성근]] 감독도 그런 욕을 먹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다. 김성근 감독은 그래도 자기 팀의 전력을 최대한으로 쥐어짜서 승리하려고는 할 지언정 고의로 져주기 게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다만 [[KIA 타이거즈/2009년/6월/25일]] 게임에서 져주기 게임을 하긴 했지만 이 때는 무승부=패 시절이라 항의성으로 [[최정]]을 투수로 기용했다. 한창 시즌이 진행 중인데 기아를 위해서 져준 것은 아닌 만큼 이 때와는 다르다. 져주기보다는 던졌다에 가깝다.] || [[파일: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 최동원.jpg|width=100%]] || 이런 막장같은 상황은 승리를 위해선 무슨 짓이던 서슴치 않는 삼성 김영덕 감독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게다가 OB 베어스 감독(김영덕)과 투수코치(김성근)로 원년인 1982년 우승까지 이루었던 2명간의 악연이 겹처서 벌어진 일이다. 1983년 시즌 종료이후 김영덕은 감독 사퇴이후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기로 예정돼있었고, 이 상황에서 김성근에게 삼성 감독직 제안이 들어온다. 김성근은 이걸 김영덕에게 상의했는데,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한다. 결국 김성근 투수코치는 OB에 잔류하는데, 열흘 뒤에 삼성 감독으로 김영덕이 발표된 것이다. 즉 자기 후배가 갈 자리를 가로챈 김영덕 감독...이 사건으로 1984년 시즌 내내 삼성과 OB 경기는 살벌한 분위기에서 치러졌고, 난투극도 여러번 불거졌었다. || [youtube(uPfDIbjq2pw)] || |||| {{{#ec1c24 '''1984년 한국시리즈를 요약한 영상'''}}} ||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38|히스토리 37 KS 4승! 최동원의 1984 '불멸의 전설']] 이에 자존심이 상한 롯데는 최동원을 필두로 반격에 나선다. 당시 롯데 감독이었던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면서 1, 3, 5, 7차전에 등판하도록 최동원에게 지시를 내린다. 이에 대해 너무 무리하는게 아니냐고 묻자[* 당시 롯데의 투수진은 그야말로 최동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할만큼 비참 그 자체였다. 노상수는 1983시즌 종료 후 현역 입대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장명부와의 불화로 삼미에서 롯데로 건너와 1984시즌 10승을 따낸 [[임호균]] 외에는 돋보이는 투수가 없었다. 더구나 만년 하위 단골에서 첫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낳은 이상 우승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던 롯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책이기도 했고...], 강병철 감독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동원아, 우짜노 이까지 왔는데"'''라고 했다. 결국 최동원은 '''"네, 알았심더. 함 해 보입시더"'''[* 최동원의 이 한마디는 33년 후인 2017년 롯데의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로 활용됐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에서 지역 라이벌 [[NC 다이노스]]에 패퇴하고 만다.]라고 답변하고 이를 수용한다. 그 결과 기록은 1차전 선발 등판 [[완봉승]][* 한국시리즈 최초의 완봉승이다. 완투승은 [[1982년 한국시리즈|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박철순]]이 최초로 달성했다.], 3차전 선발등판 12K 완투승, 5차전 선발등판 [[완투패]], 6차전 구원등판 구원승, 7차전 선발등판 완투승[*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 순연했기에 선발 등판 한것이다. 원래는 6차전 때처럼 5회쯤 등판시키려 했다고]. 총합 '''5경기 등판 4승 1패 40이닝 610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 탈삼진 35개 피안타 32개'''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는, 아니, '''최동원은 우승했다.''' --현대야구로 보면 15전 8선승 정도 되어야 한다-- >인터뷰어[*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각종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활동하던 김승규 씨가 당시 인터뷰어로 활동했다. 참고로 김승규 씨는 농구선수 출신이기 때문에 이 당시 스포츠 현장을 주로 다녔다.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최동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도 이 사람이다.]: 최동원 투수! 컨디션 어땠어요? >최동원: 글쎄요. 허허. 어제보다 좋았다고 할까요? >인터뷰어: 무리 아니었습니까? >최동원: 무리였죠. 무리지만 팀이 이길 수 있다면... 이제 올해 마지막 시합이잖습니까. 그래서 최대한 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해가지고... 마 저희들이 노력한 만큼의 어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리라는걸 알죠. 알지만도 마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가서 이기야죠. >---- >6차전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둔 뒤 인터뷰 >인터뷰어: 최동원 투수, 지금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뭐에요? >최동원: 아이고~ 자고 싶어요. >---- >7차전 경기 직후 인터뷰 마지막 7차전에서는 5번 [[유두열]]이 힘이 떨어진 [[김일융]][* 사실 [[김일융]]도 이 시리즈 3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시리즈 최동원과 김일융의 대결을 놓고 (김일융의 시점에서) '''4승 투수에 가려진 3승 투수의 눈물'''이라고 회자되기도 한다. 만약 이날 삼성이 승리했다면 현재 커뮤니티에서는 최동원이 아니라 "'''김일융의 한국시리즈 4승은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기록이다'''"라는 말이 돌아다녔을 것이다.]을 상대로 역전 쓰리런 홈런을 치면서 우승하게 되는데, 사실 6번으로 나오려던 것을 기록원이 실수로 5번으로 적었고 강병철 감독은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한다. 어찌되었던 이 뜬금포 한방으로 유두열이 한국시리즈 MVP가 되는 해프닝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최동원이 1984년 27승 다승왕, 탈삼진왕으로 정규시즌 MVP로 이미 선정되었으므로 한국시리즈 MVP까지 독식하는 걸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라는 이유로 유두열이 MVP가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성적대로 하자면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인 [[이만수]]가 정규시즌 MVP를 받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MVP를 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9타석 연속 고의사구로 홍문종을 걸러내면서 '비난은 잠시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김영덕 감독 때문에 기자진들이 외면한 이만수는 정규시즌 MVP를 놓쳤다.] 어쨌든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등판 중 홀로 4승(1패)을 거두며 롯데를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시리즈 4승은 국내 유일의 기록이며,[* 참고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58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이나오 가즈히사]]와 1959년 난카이 호크스의 [[스기우라 타다시]]가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시리즈 4승을 기록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일본시리즈 4승이 아닌 3승의 경우는 201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앤서니 배스]]가 기록한 것이 가장 최근 기록. 배스는 시리즈 6경기 중 5경기에 등판해 3승을 거뒀으며 우승을 확정짓는 6차전에서는 '''1타점 적시타도 쳤다.''' 사실 시리즈 3승도 상당히 드문게 일본프로야구에서도 바스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52년 간 일본시리즈 4승은 커녕 3승 투수도 없었다.''' 다만 배스의 승리는 이나오나 최동원보다 덜한게 등판한 5경기 모두 전업 불펜으로 나온 거였다. 당시 배스는 선발로 영입되었으나 5점대를 찍으며 부진한 바람에 불펜으로 전향했던 상태였고 일본시리즈에서는 불펜으로 나왔다. 허나 일본시리즈에서의 활약도 무색하게 배스는 재계약을 하지 못했다. ERA가 3.65였는데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저 정도 성적이면 선발이면 4선발 수준이었고 불펜으로도 필승조들은 최소 2점대는 찍어줬기 때문에 신뢰감을 못 준듯. 물론 배스가 2018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은 걸 보면 본인이 떠나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 당연하지만 그 누구도 경신할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이다. [* 한국시리즈가 7전 4선승제라 4승이 최다이기 때문. 9전 5선승제 이상으로 한국시리즈가 개편되지 않는 한에는 경신 가능성이 아예 0이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KBO리그의 현 제도하에서 가장 경신가능성이 낮은 기록은?" 식의 문제를 내기도 한다.] 이 당시 혹사에 대한 후폭풍이 경기 종료 후 바로 나타났는데 리포터가 마운드를 내려온 최동원에게 달려가 지금 무얼 가장 하고 싶냐고 묻자 자고 싶다고 답변한 일화가 유명하다.[* 실제로 2011년 9월 25일 방영된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에서 당시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또 우승을 한 당일 밤에 롯데 구단 우승축하파티에 참석한 최동원이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코피를 쏟아버렸다는 것.[* MBC 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편을 보면 코에 휴지를 끼우고 노래를 부르는 최동원의 모습이 나오는데 표정으로 보기에도 매우 피곤해 보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최동원의 팀 후배이자 전담포수이자 한국시리즈 7차전 종료 직후 기뻐서 최동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끌어안았던 사진으로도 유명한 [[한문연]]이 2015년 최동원을 추억하며 기리는 의미의 [[SBS Sports]] 주간야구 방송에서 이 사건이 실제 일이냐는 질문에 맞다고 직접 증언했다.] 단순히 어깨나 팔꿈치에만 무리가 간게 아니라 몸 전체 피로도가 심각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한국시리즈 선발 4회 구원 1회 총 5회 등판이라는 기록이 얼마나 무식한 혹사였는지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